유럽에 초밥 도시락 팔아 5000억원 켈리델리 :: 알찬정보 꿀팁가득 펜지텀블러

 

 

 

1985년 상경한 열일곱 살 소녀의 삶은 이랬다. 아침 일찍 일어나 와이셔츠 공장에서 오후 5시까지 미싱을 돌렸다. 퇴근 후 기숙사로 달려가 씻고 저녁을 먹은 후 버스를 타고 야간고등학교에 갔다. 수업이 끝나면 다시 기숙사로 돌아와 3층 침대 안에서 잠을 잤다. 그래도 행복했다.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녀의 고향은 전북 정읍. 육남매 중 다섯째인 그녀를 학교에 보내기 어려울 만큼 가난했다.

 

이 소녀는 자라서 어떻게 됐을까. 프랑스의 카르푸, 독일의 에데카, 영국 웨이트로즈 등 유럽 대형마트 식품 코너에 가면 보이는 '스시데일리' 매장. 이 브랜드를 가진 켈리델리 그룹의 창립자가 바로 켈리 최(50·한국명 최금례). 켈리델리는 유럽 10국에 700여 개 매장을 가진 요식 기업으로, 직원 수는 407명에 지난해 매출은 5000억원이다. 지난달 방한한 최 회장을 서울 강남에서 만났다.

 

 

무작정 떠난 유학길


―공장 기숙사에는 얼마나 계셨나요?

 

"공장 다닐 때 나름 행복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버스 타고 같이 학교에 가던 친구가 밥 대신 먹은 백설기 빵이 목에 걸려 죽은 거예요. 그 친구 장례식을 치르면서 '이렇게 사는 건 아닌 것 같다. 탈출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첫 꿈이 디자이너였다고요.

 

"졸업 후 명함 인쇄 공장서 일하게 됐는데 거기서 만난 외국인 디자이너가 너무 멋진 거예요.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복장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죠."

 

―일본 유학은 어떻게 결심했나요?

 

"학원에 다니다 보니 대부분의 디자인이 일본에서 오는 거예요. 용어도 그렇고."

 

―1980년대인데 유학 가는 게 쉬웠나요?

 

"여권 만들기도 어려웠어요. 전 그냥 '지금도 아르바이트해서 학교 다니는데, 일본이라고 못할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추진력이 대단하네요.

 

"생각보다 겁이 많아요. 일본 갈 때도 동생한테 유서(遺書) 건네고 갔어요."

 

―그러다 프랑스행을 결심하게 된 건가요?

 

"제가 이케부쿠로 복장학원에 다녔는데, 일본 디자인은 다 프랑스에서 오더라고요. 다시 '일본에서도 살았는데 프랑스라고 못할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1995년 무작정 비행기를 탔죠. 타고 알았어요. 프랑스말로 '안녕하세요'가 '봉 주르'라는 걸."

 

 

 

 

10억 빚더미에 앉은 한인 여성

그녀는 파리의 디자인 학교를 졸업하고 파코라반 등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다. 그런데 한국인 친구 제안으로 동업한 광고회사가 몇 년 만에 망하면서 10억원의 빚을 지게 됐다. 그녀 나이 마흔이었다.


―사업 실패 후 뭐가 가장 어려웠나요?

"예전의 나를 내려놓지 못하는 것. '내가 사장님이었는데, 나는 비서도 운전기사도 있었는데'라는 것."

 

―두 번째 사업 아이템은 어떻게 찾았나요?

"아시아인이 외국에서 돈 많이 안 들이고 성공한 아이템을 공부했어요. 그러다 보니 수퍼에서 하는 요식업을 생각하게 된 거죠. 그때부터는 수퍼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그렇게 2년을 하니 직원 1000명인 수퍼에서 직원들끼리는 몰라도 저는 알아요."

 

―그렇게 선택한 게 초밥이었나요?

"처음에는 수퍼에 납품하는 삼각김밥을 하려고 했어요. 그러려면 10억원짜리 무균 공장이 필요하더라고요. 그래서 즉석에서 스시를 만드는 사업을 생각하게 됐죠."

 

―프랑스 초밥 장인 야마모토상, 미국 스노폭스 김승호 회장, 드니 하네칸 전 맥도널드 유럽 최고경영자(CEO) 등이 모두 도와주셨는데요.


"제가 멘토로 삼고 싶은 사람들에게 무조건 들이댔어요. 유명한 사람들은 내게 관심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버리고, 그 사람들의 저서와 인터뷰를 모두 읽고 들이대면 아무리 바쁜 사람도 답장을 해줘요."

 

 

 

 

유럽 아시아인들에게 일자리를

현재 세계 명문 경영대학원(M&A) 교재에는 켈리델리 성공 사례가 담겨 있다. 지난해까지 판 도시락만 1억5000만개, 시장 점유율은 50%로 유럽에서 1위다 .

 

―해외 진출은 어떻게 하게 됐나요?

 

"영국·독일 등은 저희가 접촉했고, 스페인은 먼저 제안이 왔어요. 스페인 한인들은 예전에 어업을 하기 위해 왔다가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많았어요. '내가 스페인 카르푸와 체결만 하면 이 사람들 다 취직시켜 줄 수 있는데'라는 생각이 들어 진출했죠."

 

―가족, 한국에 대한 원망은 없으셨나요?

 

"처음엔 조금 했어요. 그런데 서울 공장에 오니 중학생들도 많더라고요. 그래서 이 나이까지 부모님이 키워주신 데 감사했어요. 아빠가 사고로 일을 못하시거든요. 엄마가 과수원일 등 품앗이하러 다녔어요. 제가 서울 갈 때 엄마가 1만원을 줬어요. 엄마한테는 진짜 큰돈이었어요. 전 거기서 3000원을 아빠에게 좋아하는 막걸리 사 드시라고 드렸어요."

 

―창업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요?

 

"공부부터 해야죠. 사업 시작하기 전에 책을 100권 넘게 읽었어요. 초밥집에서 일도 해보고. 카페에서 서빙도 안 해본 사람들이 카페부터 차리려고 하는 것 같아요."

 

―다음 꿈은 뭔가요?

 

"유럽 어딜 가나 메인 스트리트에 한국 식당이 있고, 수퍼에는 고추장 소스가 타바스코 소스처럼 진열돼 있도록 하고 싶어요. 제가 2016년에 재단을 만들었는데, 창업을 돕는 액셀러레이터 역할을 하고 싶어요. 20대는 도전하고 30대는 충성하고 40대는 성공하고 50대는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출처 조선일보

 

 

 

바닥부터 시작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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